권력이라는 이름의 오만의 수레바퀴 ‘집단적 강요’와 ‘기분의 권력화’가 마주한 민낯
우리 사회의 상식은 고정된 과녁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변화해 왔다. 과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조직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이제 낡은 유물이 되었고, 그 자리는 개인의 존엄과 정서적 안녕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채우고 있다. 산후우울증을 치료의 영역으로, 육아휴직을 공동의 권리로,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펫로스(Pet Loss)를 정당한 애도의 과정으로 인정하는 변화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개인을 소모품으로 보지 않겠다는 진보의 선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적 진보 이면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오히려 더 교묘해진 본질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바로 시대를 불문하고 반복되는 ‘권력이라는 이름의 오만의 수레바퀴’다.
권력의 첫 번째 바퀴: 집단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과거의 권력은 거대하고 수직적이었다. 국가와 기업, 조직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은 늘 뒷전이었다. 당시의 리더들은 "조직이 살아야 개인이 산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개인의 신념과 생활을 통제했다. 특정 종교 행사에 참석을 강요하거나, 퇴근 후 회식을 충성심의 척도로 삼으며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위는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이 시기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한을 '개인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칼'로 착각했다. 상명하복의 군사주의 문화 속에서 개인의 고통은 나약함으로 치부되었고, 상사의 부당한 업무 지시나 인격 모독은 조직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으로 포장되었다. 이는 명백한 권한의 남용이었으며,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을 집단의 목표라는 명분으로 압살한 어두운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권력의 두 번째 바퀴: ‘기분’을 무기로 삼은 새로운 갑질
집단주의가 힘을 잃고 개인 존중의 시대가 도래하자, 오만의 수레바퀴는 전혀 다른 숙주를 찾아냈다. 이제 어떤 이들은 ‘사회적 약자’ 혹은 ‘피해자’라는 프레임 뒤에 숨어, 그 지위를 타인을 공격하고 통제하는 새로운 권력으로 휘두른다. 과거의 권력이 위계에서 나왔다면, 현대의 변종된 권력은 자신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분에 따라 타인을 공격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최근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약자 코스프레’를 통한 권한 남용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정당한 업무 피드백이나 합리적인 조직의 요구조차 단순히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거부하며, 오히려 상대방을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행태가 빈번해지고 있다. 이것은 과거 CEO들이 종교를 강요하거나 사생활을 짓밟던 오만함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자신이 가진 우월감에서 오는 감정적인 처리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행위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성역화하여 타인을 굴복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과거의 독단적 리더들과 같은 종속(種屬)이다.
존중은 굴종이 아니며, 권리는 무기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진보는 단순히 힘의 무게 중심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동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정한 진보는 권력을 가진 모든 주체가 그 권한의 무게를 자각하고 타인의 존엄성을 인정할 때 완성된다.
우리가 펫로스를 겪는 동료의 슬픔을 유난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아이가 너에게 소중한 가족이었구나"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직의 리더는 자신의 지위가 개인의 사생활을 침범할 면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하며, 구성원 또한 자신이 받는 사회적 배려와 보호가 타인의 명예를 유린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무기가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오만함은 언제나 ‘공정함’이 결여될 때 싹튼다. 조직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리더나, 자신의 기분을 권력 삼아 타인의 삶을 과녁으로 삼는 구성원 모두 공정성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파괴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으며, 자신의 목적과 감정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주범들이다.
나아가며: 상호 존중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위하여
사회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사실이다. 산후우울증과 육아휴직을 거쳐 펫로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렵게 일구어온 공감의 영역은,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슬픔을 오롯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개인의 존엄성에서 기인한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 ‘오만함’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권한이란 타인을 돕고 조직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잠시 빌려 쓰는 도구일 뿐, 개인의 삶을 짓밟거나 자신의 기분을 맞추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도가 미비하다는 핑계로 애도를 조롱하는 리더나, 제도의 배려를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거나 무고를 일삼는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삶에 대한 경외심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오만함의 역사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결국 "나의 소중함만큼 당신도 소중하다"는 그 지극히 평범하고도 위대한 상식의 실천에 있다. 타인의 고통을 내 잣대로 재단하지 않고, 나의 권한을 타인의 존엄 위에 두지 않는 것. 거기서부터 비로소 진정한 존중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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